강천산 명소

옥호봉

옥로리 마을 뒷산을 옥호봉이라 부른다.
쌍거리에서 점몰마을까지를 옥호리로 부른다.
점몰(말)는 옛날에는 20로의 마을이었고, 별장, 종이를 만드는 지소공장이 있어 주변 언덕바지에 한지의 재료(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자연 풍광이 너무 좋아 숙거리가 번창할 때 고급 손님, 한량배들의 놀이터였다. 이 마을의 뒷산 봉우리를 옥호봉이라 부른다.

신선대

우편산 기암절경, 노송은 마치 산수화(동양화)를 그려 놓듯이 아름다운 경치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천지봉에 내려온 신선들이 밤마다 이곳에 와서 놀았다하여 신선대라 부른다.

병풍바위(거북바위)

도선(道詵)이 강천사를 가기 위하여 물을 건넜을까 다리는 건넜을까 도선교를 지나면 우측 산쪽으로 크나큰 바위하나가 병풍처럼 펼쳐졌다하여 병풍바위라 부르고 바위가 편평하다하여 편평바위라고도 불렀다.
자세히 바라다보면 볼록한 등에 목을 쭉 빼고 있는 모습이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거북바위라고도 부른다.
수십길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넓은 삿갓 모양의 암반위로 맑은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다. 이 암반은 “갓바위”라 불리고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이 있다.
그리 깊지 않은 이곳 “소”에 밤이면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놀던 곳이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신선이 내려와 목욕하기 위해 벗어놓은 갓을 깜박하고 그냥 올라가, 오랜 세월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갓은 그만 바위로 변했다하여 갓바위 또는 선관(仙冠)이라고 한다.
한편 다른 전설로 강천사(절)를 찾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 바위 밑을 지날 때면 마음이 섬찍하여 머뭇거린다.
전생에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은 바위가 넘어와 자기를 덮칠 것 같은 마음이 (생각이)들어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부처님께 만수무강을 빌고, 지나는 사람마다 얇고 마음에 드는 납작한 돌만을 골라 바위틈에 끼우고 소원을 빌었다는 전선이 내려오고 있다.
강천산 호랑이에 얽힌 전설도 재미를 더 한다. 강천산에 사는 호랑이는 새끼를 낳으면 병풍바위 아래로 떨어뜨린 후 올라온 새끼만을 자기 새끼로 인정하고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주역에 통달한 어떤 사람이 축지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병풍바위 아래에 앉아 가볍게 돌을 던지면 바위 위까지 올라가고, 무릎을 꿇고 바위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렸다는 전설이며, 도사부인도 주역에 통달하여 구림면에 사는 딸의 밥상을 차려주고 다시 내려오는 도사남편의 밥상을 차려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병풍바위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찾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시게 한다. 사시사철 쉴 새 없이 물방울을 튀기며 흘러내리는 물에서는 무지개가 피어나고, 음이온도 발생하고 있다. 폭포를 보는 순간 만큼은 인공이든 자연이든 보는 이는 모두가 탄성을 연발케 한다.

금강계곡(탑상골)

그 옛날 많은 풍류객들이 즐겨찾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청수암석이 절승을 이루고 있으며 선비들이 시를 짓고 시를 읊조리며 골수내 잔을 띄우며 즐겨 놀았던 유상대가 있다.
자연의 희귀함, 자연의 신비로움 단단한 암반(석)뤼로 쉴세없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오니 금강을 보는듯하여 금강계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예전에는 골짜기 입구에 큰바위 3개가 탑처럼 쌓여있다하여 탑상골이라 불렀다.

금강문, 투구봉, 범바위

아름다운 자연경관, 금강을 보는 듯 하여 금강교를 놓아 건너가니 좌측산 기슭에 하늘을 찌르듯이 높이 솟아 있는 바위 하나가 장군의 투구를 닮았다 하여 투구봉 또는 장군봉이라 부르고 그 옆으로 신의 조화가 아니면 뚫을 수 없다는 금강문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 금강문을 통하여 하늘을 볼 수 있다 하여 통천문이라고도 부른다.
그 뒷편으로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울부 짓는)이 마치 호랑이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호두암 또는 범바위라고 부른다.

※ 금강문(金剛問)
1. 고려 충숙왕 13년(1316) 덕현선사가 절주위의 경치가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2. 매우 단단하여 결코 부서지지 않은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대일여래(불교)의 지덕을 비유적으로 지덕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트릴 수 있음을 표현한 말

어미바위와 아비바위

하늘나라에서 살기를 천년부부에 연을 맺어보려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는 선남선녀는 흐르는 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가 바라만 보다 끝내는 부부의 사랑을 맺지 못하고 바위로 변해 버렸다는 어미바위와 아비바위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마치 여자의 “성”을 연상케 하는 여근암과 남자의 “성”을 연상케 하는 남근암이 좌우측으로 갈라선 채 애처롭게 서로 바라만보고 서있다.

거라시바위(걸인)

문전걸식 구걸해온 거지들이 이 굴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받아 강천사 스님에서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복을 빌었다는 거지와 승려와 돈에 얽힌 전설의 바위를 거라시굴 또는 걸인바위라 부른다. 이 굴암을 지나는 사람이면 한번씩은 앉아본다.

송음암

기암괴석으로 장엄한 절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금강을 보는 듯 그 비경이 장관이다. 여기가 바로 강천의 제1경이다. 그 옛날 수천년 묵은 노송들에 의해 가리워졌으나 일제말기 소나무 산판(벌목)으로 노송들이 사라지고 나니 큰바위가 나타나 그때부터 송음암이라 불렀으며 좌측으로 생겼다하여 광대바위가 있다.
송음암 앞 바로 냇가 옆에 비가 오려면 이끼가 낀다는 이끼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부도전

강천사가 거느린 12암자 중 하나인 이곳 부도암에도 약비라는 스님이 살았으며 설씨부인의 권선문첩으로 시주를 구하여 강천산내에 절을 지어 부도가 옆에 있어 부도암이라 이름지었다.
스님이 입적하게 되면 (돌아가시게 되면) 나무덤이에 올려 불로 태워 화장(다비식)을 하게 되면 도를 통한 스님의 몸에서 사리가 나와 돌탑속에 넣어 모셔 놓는 탑은 사리탑, 또는 부도전이라 부른다. 세가에서는 일명 “장독대”라고 불렸다.
현재 4기가 있으며 강천사와 300m 떨어진 송음암 아래 석종형으로 지대석과 석종, 보주되어 있다.
고려시대후기 사회적 불안과 불교의 퇴락으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간략한 형식의 부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 전면에서 왼쪽 첫 번째 이월당 순으로 되어있다.
현재 부도전에는 사리탑 4기가 지금은 남아있다.
왼쪽으로 첫 번째 이월당 스님, 두 번째 월하당 스님, 세 번째 미상, 네 번째 미월당 스님의 것이다.

천우폭포

물통골 계곡 천우사 절터 아래 해발 300m지점에서 PVC를 사용 자연유하식으로 400여미터를 관수시켜 폭포수 이루게 하였다.
하늘에서 많은 비가 내리면 자연적으로 폭포가 이루어진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천우폭포 아래에는 송어가 서식하고 있다(현재는 송어 없음)
송어는 연어목, 연어과 희귀성 어류이다.
몸길이는 약60cm자라며 연어보다 몸이 굵고 둥굴며 약간 옆으로 납작하다.
주둥이는 연어보다 무딘 편이고 바늘이 둥근비늘(원린)이다.
강에서 산속천에서 살던 산천어와는 달리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기에 다시 강으로 올라오는 습성이 있다.
송어는 수온 15도 이하의 1급수에서 잘 자라며 강천의 계곡천에서 송어가 서식하는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약수폭포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옆 건물 건너 산구가 매우 아름다운 골짜기가 있다.
옛날에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절에 사람들은 병을 치료하기 위하셔 깊은 산과 맑은 물이 있는 자연을 찾아서 피부병에 시달리고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플 때면 물맞으러 많은 사람들이 이 계곡을 찾았다.
특히 오월 단오날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산과 강으로 나아가 물고 맞고 화전놀이도 하고 하루를 즐겼다.
서출동유수, 강천수는 한마디로 약수물이었다. 이처럼 좋은 자리에 스님들은 암자를 짓고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께 불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약수암이라 암자가 있었으며 그 뒷편으로 7m상공에서 떨어지는 약수폭포가 있으며 전설만을 남긴 채 지금은 암자 터만 남아있다.

아랫용소

깊이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옛날에는 명주실 한 타래가 들어갔다는 깊은 용소이다.
윗용소는 숫용이 살고 아랫용소는 암용이 살았다는데 세상이 어지러우면 예언이나 하듯이 용이 소리 내어 울었다는 난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또한 밤이면 선녀들이 용소에 내려와 목욕을 하는 곳이라 하여 옥녀담 또는 선녀탕이라고도 부른다.
풍산면 향가리에 사는 용은 소첩이고 이곳에 사는 용은 본처로서 하늘의 승천과 순창에 사는 농사꾼인 노총각에 얽힌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이 고장 선비들이 아름다운 자연을 찾아 흘러가는 물가에 앉아 크고 넓은 바위를 술상 삼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읊으고 자연을 노래하는 이 지방 아홉선비들의 만남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주변에 있는 큰바위에 구우옥천 인명과 유상대와 부르는 큰 암반위에 구우유상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부처바위

강천사와 함께 우측 산 기슭에 버티고 서있는 관음암
이마에 머리띠며 얼굴모양이며 두건을 쓰고 배낭을 메고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부처를 닮았다하여 부처바위라 부른다.
건너편 동암에 사는 스님들이 새벽에 나와 염불하고 참배하였다 한다.

강천사

신라 51대 진성여왕 원년(887)에 풍수지리설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한 연기 도선국사께서 보광전 첨성각등 사찰을 창건하셨으며 그 후 고려 27대 충숙왕 3년(1316)에 덕현선사(스님)가 오충석탑을 중창하는 등 사찰이 크게 번창하였다.
12개 암자를 지어 사세를 확장했다고 한다.
강천사의 원명은 복천사라고 하였으며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하여 용천사라고도 불렀다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말미암아 절이 쇠락하고 말았다. 그 후 신령스런 신허스님이 광덕산 가운데 명승지를 골라 초암을 짓고 지낸 후 폐허가 되자 세월이 흘러 증조스님과 약비라는 비구니스님(부도암) 두 분이 설씨의 도움을 받아 서월은 내어 시주를 모아 약비스님으로 하여금 권선문을 돌리게 하여 중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가 성종 13년(1402년)에 작성된 “강천산 모연문(설씨부인 권선문첩에 의해 다시 절이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승람 제 39권 순창편에는 복천사로 1760년 (영조36년) 경진판 옥천 군지에는 복천사라 하였으며 이보다 훨씬 앞서 선조 때 학자 귀봉 송익필이 강천사에 유숙하며 “숙,강천사”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으며 일부에서는 이전에 강천사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또 한편 강천사는 조선조 중종이후부터 불리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이유는 “신증 동국여지승람 1530년(중종25년)에 완성 되었는데 이때는 강천사라는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옛 강천사 규모를 보면 1760년 경진판 옥천 군지에 의하면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라 하였으며 전설에 의하면 강천사에 소속한 암자수가 12개라 하였는데 또한 옥천 군지에는 (영조36년(1760년)) 명적암, 용대암, 연대암, 왕주암, 적지암등 8개 암자기 기록되어 있으며 그 당시 500여 수도승이 살았다는 대 거찰이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용대암과 연대암의 경치는 아주 선정이어서 많은 탑승객이 드나들었다. 허나 용대암에는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 황용과 천용이 버티는 지금의 강천사 자리로 이전을 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시작 1592년(선조25) 발단 다시 임진왜란(1596년)으로 사찰건물과 연대암자 등 12암자가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선조37년(1604소요 태능대사가 중창) 철종6년(1855년) 금융스님이 다시 지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보광전 첨성각 칠성각 등이 12월 20일 완전 소실되었고 임진왜란(1592.4.13~1597.1.15(2차침입-정유재란(6년7개월)) 또 다시 1956년 이 지역 출신인 주지 해산 김장엽스님이 보광전 첨성각을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1977년 관음전을 1978년에 보광전을 이경모스님에 의해 각 각 신축 1986년에는 보광전 건립, 요사채, 선방, 객사를 건립하였다.
1992년에 김재덕스님이 보광전 건물을 재정비 노후된 첨성각을 해체 후 다시 복원하였다.(1997년) 2009년 9월에 객사를 헐고 그 자리에다.

※소요태능대사-담양월산면 태생-서선대사의 전법제자
창건자 도선이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머리,가슴, 턱,다리에) 미륵비구니 스님이 살아야 빈찰이 부찰로 바뀌고 도량이 정화된다고 한 예언에 따라 절을 유지
한때는 이경모 비구니 스님과 함께 비구니들의 수도 도량으로 절이 발전한바 있었다.
강천사 외벽(대웅전)에는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이경모 스님)
창호는 교살창이며 중앙칸은 3분합이고 좌우의 협간은 2분합으로 내부의 천장은 산존부로자상은 보존불이 석가보니불이고 협시불은(보살)지장보사로가 관음보살이다.
목조구조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고 석가 삼존불 좌상이 뒤에는 영산후불태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로는 지장사왕땡, 산신땡 (1933)칠성탱, 신중탱(1962)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상이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관음보살은 연꽃보우리를 들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석등의 중대석과 괘불대 3기 (당간지주)가 있고 왼쪽 괘불대 몸체에 “건웅85”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영조19년(1743)에 조성된 것임 “건웅팔세십오”

◎ 강천사 12암자
➀ 명적암 경상북도 극락정사(지우,초인,지관)
➁ 용대암 담양용면 도림리 죽림정사
➂ 연대암 장선군 용전면 감로암(이경모 주지스님)
➃ 왕주암
➄ 적지암
➅ 원등암 선주암, 일정암, 백용암 등 김재덕 스님의 자료에 의함.
➆ 승방암
➇ 약수암
➈ 비룡암
➉ 부도암
⑪ 동암
⑫ 서전

오층석탑(강천사)

지방유형문화제 제 92호
지정일자:1979.12.27
팔덕면 청계리 996번지
소유자: 강천사

1. 고려 충숙왕3년(1316) 덕현선사(스님)가 강천사 중건과 함께 세운 것이라 한다.
2. 1950년 6.25동난 때 화를 입어 도뢰된바 있었다. 그 후 1958년 주지 김장엽스님이 강천사를 다시 세울 때 탑도 당시 세운 것이다. 이 다보탑의 높이는 2.5m이고 (235cm이고 넓이 78cm 화강석재 5층육각) 5층탑으로 되어 있는데 탑신 234층의 옥개석이 1층은 기단 6.25당시 총탄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파손된 석등의 중대석과 보주가 일부 남아있으며 단간지주 4기와 가공된 석재들이 몇 개 흩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모든 사찰이 완전 소실 되었으나 본 탑만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삼인봉

이 지방 세 고을의 정승 삼현을 경모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벼각을 세워)제향하니 삼인의 기세를 상징하듯 삼인대 뒤편의 우뚝 솟은 세봉우리를 삼인봉이라 부른다.

“관음암 또 부처바위”전설
바위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옛날부터 신령스럽게 여겼으며 그 앞에서 기도를 하려는 소원 한가지는 들어준다는 종교는 신비스런 영험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건너편 산자락에 동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많은 스님들이 관음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사람이 기도를 하면 단순이 바위로 보이고, 마음이 청정하고 선덕을 많이 베푼 사람이 기도를 하면 꿈에 이 바위가 관음보살로 현신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삼인대

지방 유형 문화재 제27호
*지정일: 1973년 6.23
*소재지: 청계리 산 271번지
*소유: 국유

*비각 안에는 높이 157cm 두께 23cm의 폭의 삼인대 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승정후 재갑자 1744년(영조20년) 4월에 세운 것으로 순창군의 선비, 홍여통, 윤행겸, 유춘향 등이 발기하여 이비를 건립하였다.
*대학자인 도암 이재가(1680~1746년) 비문을 짓고 정암 민우수(1694~1756)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지수재 유척기(1691~1767년)가 전서를 쓴 것이다.
*조선조 제 10대 연산군 학정이 극에 이르자 1506년(연산군12년) 드디어 지중추본사 박원종, 이조판사 상희안, 유순정 등이 주동이 되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9대)의 둘째 아들이며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의 비휘를 거슬려 파직된 후 이조판서 유순정의 조력을 얻어 중종반정이 시작되었다. 중종비 신씨는 연산군대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이었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군의 일파가 반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하고, 신수근의 딸 신씨 중종비(왕비)로 두었다가는 뒷날 후환이 염려되어 중종에게 폐비를 강요했다. 중종은 처음에 반대 하였으나 결국 공신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폐출하고 1년 후 윤여필의 딸인 숙의 윤씨를 새왕비로 맞아 들였다.(1506년 중종 1년 7일만에)
*장경왕후 윤씨는 왕자를 낳고 살다가 결혼한지 10년만인 중종10년(1515년)에 사망하였다.
*계속된 천재지변에 놀란 조정에서는 신하들에게 구언교 내리게 되었다.
이 때 순창군수 충암 김정(1486-1521), 담양부사 눌재 박상(1471-1530), 무안현감 석헌 유옥(1485-1519)등 세사람이 비밀리에 이곳 강천산 계곡에 모여서 과거 억울하게 폐위된 신비를 복위시킴이 옳다고 믿어 각자 자기의 관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파직과 죽음을 무릅쓰고 맹세 하면서 신비복위 상소문을 작성 한곳이라 하여 이곳을 삼인대라 부르게 되었다.
*세사람은 관직으로부터 추방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는데 당시 대사헌 권민수, 대사간 이행 등 반정공신들이 적극 나서서 체포 국문할 것을 주장하여 잡아다가 처형하려 하자 심히 유급한 지경에 정유순과 좌의정 정광필 우의정 김응기 등은 진언이 비록 광망하지만 구언으로 인하여 나온 것임을 들어 극력으로 말리어 단죄의 부당함을 주장함으로써 우선 큰 화는 면하고 도배형을 받는데 그쳤다. *김정은 암림역 보은으로 박상은 오림역 남평으로 유배되었다가 김정은 그 후로부터 4년 후인 1519년 기묘사화에 조광조와 함께 연류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어 1521년 사사 되었는데 그때 나이 36세 였다. *박상은 신사무옥에 연류되어 제주도로 귀양 사사하였다.
*상소문에 석현 유옥의 이름이 빠진 것은 형제가 없으니 노친을 봉양할 사람이 없어 도리어 효도에 상함이 되지 않겠냐고 “소장”에 연명을 못하게 만류로 화를 면했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숙종25년(1699년)에 현감신규의 상소가 또 있었으나 복위 되지 못하고 그 후 영조 15년(1739)에 영조대왕이 명단으로 상소를 올린지 224년만에 드디어 복위되니 단경왕후로 추상하고 그 능을 온릉이라 하였다. 세분의 선생께서는 증직과 사제문을 내려 충절을 그렸다.
*그 후 신도공(수근)의 5대손(21세손) 휘의 용강공 조부가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태문 6실에 영조대왕이 직접신주를 모시고 온릉의 모든 공사를 완료하였다. *폐비 후 신씨(1487-1557) 71세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233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지났다.
소재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앙리 41-19번지 온릉, 단경왕후
*장경왕후는 중종10년(1515년) 세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으로 6일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인종 이외에 호계공주를 낳고 죽었다. *1978년 매년 음력 7월 그믐 세선생의 후손들이 지역의 뜻있는 향토인 삼인문화 선양회에서 이 곳 삼인대 앞에서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태묘: 조선시대 역대임금과 왕비 위폐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을 뜻하며 종묘와 같다.
*나라가 어려울 때 상소를 올려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대쪽 같은 성품을 지닌 이 고을의 수령님(김정, 박상, 유옥) 삼현이 나라걱정에 눈물을 흘렸던 곳이 바로 삼인대다. *세월이 흐를수록 영원히 지며보는 삼인대의 기상, 그날의 비밀을 혼자만이 지켜온 외로운 노송나무가 오늘도 삼인대를 바라보며 서있다.

◎ 삼인대에 얽힌 유래
*조선조 9대 성종은 왕비 공혜왕후 한씨(한명로 딸), 한병화는 큰딸을 예종에게 작은딸을 성종(자산군)에게 시집을 보냈다. 허나 공혜왕후 한씨는 자식이 없이 19세의 나이로 죽었다.
*성종의 후궁으로 폐비윤씨(연산군의 어머니)가 왕비로 책정 세자(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성종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하여 왕(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루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었다가 사약을 내려 그녀를 사사하였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폭정과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갑자사화의 원인이다.)
*정현왕후(선릉) 윤씨는 세 번째 부인이며 왕비로 책정되자 이가 중종(진성대군)의 어머니시다.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친 어머니로 알고 자랐으며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을 왕으로 등극 독재군주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연산군은 여염집 아낙을 정탈하고 사슴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폐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중종반정의 원인)
*성종이 죽자 조선왕조 제10대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암행어사를 파견 민정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신제 확충으로 별시문과를 급제 시키고 국조보감을 편찬,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토록 하였다.
*그러나 사림파 관문들과 신경전을 벌려 사람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 귀찮게 하였다.

◎ 무오사화의 원인
*사림파 거두 기종직과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가 무오사화를 발생, 사림파들을 처형하고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 같이 행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여(기생을 흥청) 향락에 젖어 있었다.
*여염집 아낙을 겁탈, 세금부과, 공신점 몰수, 이때 정권을 장악한 임사홍이 폐비윤씨(성종의 둘째왕비)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 살생극을 자행 이것이 장자사화이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어지자 급기야 연산군 12년(1506년)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진성대군) 즉 연산군의 이복동생을 즉위하니 이른바 중종반정이 시작되었다.
*연산군은 장녹수(후궁)기생을 좋아했고 영수란 딸을 낳았다.
*연산군 시절에 유명한 내시 김처선이 있었다.

※치마바위에 대한 전설
*신비를 폐출 - 하성위 정현조집 사가에 머물렀을 때 의왕산 큰바위에 -신비의 통상(붉은치마)을 중종이 안부삼아 그리움을 달랬다 한다.
*신비의 폐위는 중종의 뜻이 아니었음, 1년 후 장경왕후 윤씨를 계비로 책정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았다.
*중종(1488-1544) 9명의 왕자와 11명의 공주를 낳았고 57세로 죽었다.
*단경왕후(온릉)신씨 성종18년(1487), 명종12년 1557년에 7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19세부터 51년을 남편의 버림받고 홀로된 삶을 살았다.)
*신수근(세종 32년,1450~1506년) 중종(1년) 동생 신수영, 신수겸도 죽임을 당하였다.
*신수근의 누이 즉 매부 연산군(신씨의 딸 중종비) 신수근은 연산군 때 좌의정이었다.
*연산군은 무오, 갑자사화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고 포악한 정치로, 성균관을 폐하고 오락장소로 이용하는 등 폐륜정치로 중종반정이 시작되고 연산군은 강화도로 귀양 사망하였다.
*장경왕후 타계하고 천기마져 불순하자 중종9년 9월 9일에 신하들에게 구언교를 응지(내리게)한 것이었다.

“상소문 내용”
(조선 왕조 실록에 수록된 상소문 내용)
① 부부의 도가 인륜의 시초요, 만화가 구원이고, 기강이 으뜸이라는 것을 상기한다.
②폐출에 정당한 이유가 없으며 조강지처는 함부로 내치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큰 이유와 명분이 없었고 단지 박원종의 사심이다.
③ 박원종이 종국에 알린 것도 잘못이라는 사실
④ 왕후가 비었으니 폐출된 신비를 복위시킴이 마땅하며, 박원종 등 공신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박원종, 지중추부사), 성리안(이조참판), 유순정(이조판서)
*중종반정, 연산군, 폐출계획-강귀손이 신수근(좌의정, 설득 실패) 신수근의 누이 연산군 왕비, 딸이 중종비 발설을 두려워하여 신수근을 살해 후환이 두려워 신씨 폐출하였다.

왕자봉

강천사 우편 산봉우리를 정상 왕자봉(해발583.7m)이라 부른다.
산성산 정상 연대봉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스님이 꿈에 앉아 합장을 하고 수도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산의 기세가 충천하여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새터를 잡아 1답에다 조상의 묘를 쓰게 되면 훗날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왕자)아들을 낳아 가문의 영광이 자자손손 명예와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스님의 (말씀에)예언이 있어 왕자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신선봉, 삼선대(전망대)

광덕산 줄기 동쪽으로 하늘재를 넘어 삼인대 계곡으로 내려오니 좌측으로, 높이 솟아 있는 암봉(암산) 신선봉(해발425m)이라 한다.
오랜 세월, 모진풍파 시달리다 외롭게 홀로 살다 가신 신씨 할머니 넋을 위로하려고 밤마다 신선되어 구름타고 바람에 날리어 암봉에 내리니 여기가 바로 신선대다 삼인대다.
세 신선을 우러러 받드는 모습인양 기암괴석이 천태만상이다. 마치 군신이 천왕을 우러러 보는 형국이다.
세 신선의 기세인양 하늘높이 치솟았다. 수천길 절벽으로 내려왔다 다시 솟구치는 아름다운 고귀함이 마치 신선을 닮은 것 같다하여 신선봉(해발425m)이라 부른다.
산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체가 아산암봉으로 되어 있으며 세 신선이 내렸다는 곳에 삼선대(정자)가 있다. 강천사 삼인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사방으로 시야가 거침이 없으니 여기가 바로 전망대다.

모과나무

강천사를 지나 삼인대 앞 도로 좌측으로 한 그루의 노지수가 서있는데 나무의 높이는 20여m, 둘레는 약 3m, 수령이 300년이 지난 모과나무다.
지금도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무늬목에 탐스러운 열매를 맺어 가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1981년 보호수로 지정관리 하다가 1998년 1월 9일자 지방 기념물 제 97호 지정하였다.

윗용소

지금은 토사로 매워져 그리 깊지는 않지만 옛날에는 용이 살 정도로 깊은 소이다. 윗용소에는 청용이 살았으며 숫용소에 밤마다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 곳이라 하여 선담이라 불렀다. 아름답기가 금강산에 있는 용소와 비슷하다 한다.
이 아름다운 선경이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놓듯이 이산과 저산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철길로 이어지고 있다. 그 밑으로 용천수가 흐르고 있어 아름다움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따금 십장생교 난간에서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지나는 이의 발길을 멈춰서게 한다.

현수교(구름다리)

윗용소에서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두산록을 사이에다 두고 하늘에 걸려 있듯이 구름다리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바로 이것을 현수교라 한다.
구름다리를 에워싸고 있는 기암괴석이 천태만상이며 신이 빚어 놓은 듯 천혜의 절경을 이루고 비룡계고고가 용머리 폭포, 아름다운 단풍나무 합작으로 자연의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현수교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지만 모양새 만큼은 구름다리다. 한때는 호남에서 제일 긴 다리로 강천산 공원 내 명소 명물중 하나이다.
길이는 7.6m 높이50m 폭1m인 이다리는 1980. 4. ~9월까지 만들어졌다. 이 다리를 건널 때 마다 아슬아슬 아찔하여 간을 서늘케 하고 고공공포증이 있는 사람을 돌아서 가게 한다.

용머리 폭포

인간세상에 나와 살기를 천년수를 다하여 몇 년 전에 승천한 숫용의 뒤를 따라 아랫용소에 살고 있는 본처인 암용과 향가리에 살고 있는 용은 소청인데,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올라가야 되는데 본처인 용은 한인간의 시비로 인하여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용이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이다.
천둥이 울고 지축이 흔들리며 괴음을 내고 꼬리를 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하늘을 오르던 용의 힘으로 만들어졌다는 비룡계곡 또는 용천계곡 우측으로 지금도 누워있는 용머리 부분에 핏자국이 남아있다. 그 위로 비가 오면 용의 눈물이 되어 흐른다는 폭포수, 이를 보고 사람들은 용머리 폭포 또는 용두폭포라 이름지어 부른다.

광덕산

호남의 명산 모악산에서 기두하여 추월산을 만들고 역룡하여 북으로 흐르다가 복흥면 주평리 뒷산에서 반환하여 복흥면 동북방으로 답동 암산에서 석보를 거쳐 용추봉에서 다시 방향을 서남으로 오누리재를 거쳐 산성산에서 잔등으로 흐르다가 솟아 오른 산이 광덕산 선녀봉(해발578m)이다. 줄기를 따라 동으로 내려오면 한이봉, 신선봉, 삼인봉, 옥호봉, 수령봉으로 되어있다.
광덕산 자락으로 저부재(저부4년)로 광덕산 서남쪽으로 내려와 분수령을 이룬다. 원설애는 초동이 피리를 부는 형상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선녀가 밤마다 계곡으로 내려와 목욕했던 것을 선녀탕이라 부르고 선녀가 옷자락을 날리고 하늘로 오르는 아름다운 모양새를 지녔다하여 선녀계곡 또는 선녀봉이라 부른다. 뒤편 광덕산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약간 솟은 바위하나가 있어 광대형상을 하고 있어 광대바위라 부르고 장군의 투구와 같다하여 장군바위라 부른다.

장군봉

아주 오래된 삼한시대에 외적과의 전쟁에서 패한 9명의 장수는 야수처럼 몰려오는 외적에게 쫓기어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기를 며칠 여기 기암절벽위로 도달하자 죽기로 각오하고 천길 낭떠러지에서 막 자결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우뚝서있는 바위들이 갑자기 갑옷과 투구를 쓴 장군으로 변하여 큰칼을 들고 달려드는 외적을 맞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외적을 사람으로 변한 장군들이 아홉 마리의 용마를 나누어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마치 번개처럼 날쎄게 외적의 목을 치기 시작하였다. 외적들은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장수들은 승리를 거두자 기쁨의 순간도 잠시 그렇게 용맹스러웠던 장군들은 본래의 모습처럼 다시 바위로 변하여 우뚝 서있다.
참으로 신기할 일이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이 바위를 아홉장군의 혼이 서린 장군바위 또는 구장군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구장군폭포

먼 옛날 삼한시대에 혈맹으로 맺어진 아홉명의 장수가 전쟁에서 패한 후 이곳에 이르러 자결하려는 순간, 차라리 죽을 바에는 다시 한번 전장으로 나가 싸워보자는 비장한 결의로 마음을 다지고(비장한마음)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는 아홉장군의 이야기가 있어 구장군바위 또는 구장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깎아 자른듯한 기암절벽은 천길 낭떠러지다. 휘엉청 밝은 달이면 밤마다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하여 선녀폭포라고 부른다.
기암괴석 사이로 굽이쳐 흘러내리는 두 줄기 폭포는 자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극치를 이루며 마치 여근곡의 형상을 볼 수 있어 찾는 이의 가슴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산수정 정자에서 앉아 나는 벌써부터 신선이 되어 선녀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착각에 빠져든다.

수좌굴

지절골 입구 좌측산 기슭에 그리 크지 않은 작은 굴이 하나있다. 그 옛날 설담과 뇌암이라는 수도승이 이굴에서 도를 닦아 도통을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성산 운대봉 북바위정상을 향해 두무릎을 괴고 꿇어앉아 명상과 수도에 전념했다는 그 옛날 수도승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수좌굴이라는 이름과 두 수도승의 이름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선녀계곡

광덕산 정상 선녀봉에서 서쪽으로 하산하면 헬기장으로 내려온다.
산성산 시루봉쪽으로 능선이 평탄하고 기암절벽위로 노송나무 밭을 한참 걸으면 시루봉, 동문이 나온다. 이 능선이 아름다워서인지 잔등이라고 부른다.
거북바위 암벽을 밑으로 내려오면 북성나무골이 나오고, 전설에 의하면 절에서 빈대가 많이 나와 스님이 견디다 못해 절을 떠났다는 빈대절골 또는 절터골만 남아있다.
계곡이 하도 아름다워서인지 아름다운 선녀가 밤마다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선녀탕이며 선녀를 바라보며 초동이 젓가락으로 피리를 부는 형세를 지녔다 하며, 나무꾼과 선녀에 얽힌 사랑바위 또는 선녀바위 등 선녀처럼 곱고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선녀계곡이다. 특히 이곳은 오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흐른다하여 물골이라 부른다.

형제봉

천산 정상 왕자봉을 지나 서쪽 강천로 쪽으로 다 내려가기 전 2개의 산봉우리가 마주보며 나란히 서 있다하여 형제봉이라 부른다.
또한 형제굴위로 (현제바위)에 있는 정상에 나란히 서있는 봉우리를 형제의 원혼이 깃든 봉우리라 하여 형제봉이라 부른다.

※ 형제굴 또는 형제바위
기암기석으로 둘러 쌓인 계곡길을 따라 오르면 연대계곡과 원등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고개를 들어 서산마루를 바라보면 동기간의 원혼이 깃든 두 형제암이 외롭게 서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정유재란 때 왜적과 싸운 의병대장에게는 7대 독자의 대를 이을 어린형제가 있었는데 출전하기 전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이르기를 “너의 집 효성이 지극하여 두 형제가 살아날 방도를 일러줄테니 당장 내일새벽에 두 형제를 강천산 계곡으로 떠나보내도록 하여라 물길을 따라 한없이 거슬러 오르면 오른편 절벽에 두개의 굴이 보일 것이니 그곳에 피신토록 하여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여라.” 꿈을 깨고 난 뒤 형제를 강천산에 피신시킨 뒤 주인집 하인이 열흘 간격으로 날라다준 찰밥으로 연명하게 하여 칡넝쿨을 이어놓고 통신수단으로 서로 생사안부를 묻고 살다가 어느 날 오던 하인이 오지 않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끝내는 죽게 되어 딱딱한 바위로 변해 버린 동기간의 원혼이 깃든 형제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강천산 개발로 인한 저수지 댐공사로 인해 훼손되어 그 형체가 변해 버렸다.

강천제2호수

원등이란 계곡입구에 조그마한 호수가 있다. 깊고, 맑고 깨끗한 강천호 속에 깊은 계곡, 맑은 물에만 산다는 산천어가 살고 있다.
푸르고, 노랗고, 빨갛고, 아름다운 풍광이 잔잔한 호수위로 비추고 사계절 풍경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강천호수가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984. 6. ~1986. 12. 사이에 축조되었으며 규모는 길이가 67m높이22m 폭4m콘크리트(시멘트)벽으로 되어 있다. 저수량 35만6천톤 유형면적 15.3HQ 만수면적 3.6HQ 사업비 671백만원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농업용수(농촌기반공사)로 관광용수로 이용하고 있으며 갈수기 때 계곡으로 흘려 한여름 피서객의 더위를 식혀 줄 뿐 아니라 폭포의 수원으로 사시사철 쉴세 없이 맑은 물을 흘러 내리게 하여 강천계곡을 적신다.

비룡폭포(구룡폭포)

용천계곡을 따라 연대계곡 암자터 쪽으로 약4Km(입구에서)쯤 오르다보면 좌측 산기슭에 기암절벽 사이로 굽이쳐 흘러 내리는 폭포수가 용소로 떨어진다.
마치 아홉 마리의 용이 암벽을 타고 꼬리치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다. 비룡폭포라 부르고 또한 구룡폭포라고도 부른다.

연대봉

산성산 최고봉인 연대봉은(해발603m) 강천의 진산으로 남록과 북록으로 나누어 두 마리의 용이 동으로 강천을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동쪽으로 서쪽하늘을 향해 오르는 모습) 강천의 가을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오색찬란한 단풍나무가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면 비단을 깔아놓은 듯 아름다운 단풍바다가 바람에 물결을 이루고 있다. 그 아래로 강천사 12암자중 하나인 연대암 있었으나, 6.25 동난으로 모두가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봉우리 이름의 뜻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름으로 보아 창조의 세계 미지의 세계(연상할 수 있는 세계), 극락의 세계를 맛 볼수 있고 불교가의 용어에 가까운 생각이 든다.
봉우리 밑으로 옛날에 연대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그 뒤편에 쌓여진 성을 순창 사람들은 연대산성이라 불렀으며 그 중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를 연대봉이라 부른다.(해발603m)

송낙바위

산성산 연대봉 우측으로 성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북문을 못하거 성의 모서리에 옥성과 같은 성벽으로 분지가 있다.
용대암골에서 서쪽을 향해 올려다보면 하나의 큰 바위산이 하늘위에 보름달처럼 보여 마치 소나무잎으로 만든 스님이 쓰는 갓처럼 생겼다하여 송낙바위라 부른다.

대나무숲(대죽골)

홍화정 옛 정자터 팽나무에서 구름다리로 가는 길목 우측에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예전에는 대나무밭이라 대나무골 또는 죽전이라 불렀다.
신선봉을 바라보며 스님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을 절터골로 생각이 난다. 이곳은 강천사 주지스님이셨던 해산 김장엽의 묘가 있다.
지금은 대나무숲 체험로로 정비되었다.

북바위

수좌굴에서 구장군폭포에서 서쪽으로 멀리 올려다보면 금성산성이 보인다. 성을따라 운대봉으로 오르기 전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있다. 잘 다듬어진 원통 모양이 마치 북처럼 생겼다하여 북바위라 부른다. 높이 서있는 봉우리에 올라가면 공포증이 일어나고 손발이 떨리고 간은 서늘케하여 바위밑을 내려다 볼 수가 없다. 멀리는 지리산과 무등산, 추월산, 회문산 가까이는 금성산성과 강천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구름위로 높이 떠 있는 모습이라 운대봉이라고 부른다.

우작골

그 옛날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이계곡에 모여 서로가 위로하며 술을 마시며 우정을 나누었다하여 계곡이름을 우작골이라 불렀으며 정산인 봉우리를 깃대봉이라 부른다.

황우제골

장안리에서 광덕산을 넘어가는 준령이며 강천사스님들이 이 제를 이용하여 왕래 하였다고 한다. 제가 하도 높다하여 하늘아래 하나밖에 없는 제라는 뜻으로 하늘제라고 불렀으며 한편 골자기 능선아래 넓고 평탄한 늪지대가 있다. 물과 숲한 목초지며 억세풀이 많이 나있다.
이 주변에 있는 황소들이 도는 큰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하여 황우제, 한우제, 하늘제(삼인대계곡)라 부르고 있다.
삼인봉과 신선봉 사이 큰 계곡이 나있으며 입구에 삼인대가 있어 삼인대 계곡이라 부르고 있다.